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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찾아 떠나는 인생 여행의 시작

보인고등학교

보인고를 일류 명문고로 키워낸 인성하이텍 김석한 회장의 성공 비결 듣는다!

작성자 : 전지연 조회 : 6048회 작성일 : 2016.03.24 00:00
출처 : mbc economy(http://www.m-economynews.com/news/article.html?no=15548)             
                                                                                  

        

보인고를 일류 명문고로 키워낸 인성하이텍 김석한 회장의 성공 비결 듣는다!

        

             
        
    
                                       
            


(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 인조모피로 한때 세계 시장을 석권한 인성하이텍 김석한 회장은 성공한 기업인으로서도 유명하지만 재정 위기에 처한 보인학원을 인수해 일류 명문고로 키워낸 학교경영자로서, 또 구자철 선수를 배출해낸 축구 명문고를 수십 년간 후원한 축구전문가이자 열성팬이기도 하다. 기업과 학교, 축구 세 개의 목표를 위해 지금도 현장을 누비고 있는 김석한 대주학원 이사장을 만나 학교 경영의 비결과 한중FTA 이후 수출 환경을 알아봤다.


Q. 보인중·고등학교는 대한제국 시기에 창교된 학교로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인중·고등학교의 역사와 창교 정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저희학교가 처음 태동한 게 1908년입니다. 한일합방이 1910년이니까 그 전에 학교가 설립됐어요. 그때 나라를 일본에 뺏기지 않으려면 젊은이들 교육 밖에 없다고 해서 내수동 145번지에다 학교를 세웠다고 해요. 당시 그 지역의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운동을 벌여서 학교를 세운 겁니다. 현재 저희 학교역사관에 방명록이 보관되어 있는데 거길 보면 모금한 분들 중에는 인력거꾼도 있고 미용사, 이발사, 기생도 있습니다. 당시 가장 많은 돈을 낸 분이 10원을 냈고 99칸짜리 기와집을 내놓은 분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학교가 시작된 거죠.


이후 주변 땅을 더 확보해서 학교가 조금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고요. ‘보인’은 ‘베풂’을 의미합니다. 제가 학교이사장을 맡고 나서 100주년이 됐을 때 옛날 내수 동 주민들의 고마운 마음을 기린다는 의미로 쌀을 나눠 드렸습니다. 화환을 거절하고 대신 받은 쌀과 현금 2천만원, 그리고 제가 사비 3천만원을 보태서 쌀 5천만원어치를 우리 학교 인근 오금동과 마천동 일대 판자촌에 나눠드렸습니다.


Q. 보인고 동문 출신으로서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것이죠.


A. 지난 2004년 7월20일에 취임해서 올해로 11년이 됐습니다. 이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저는 사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은행차입 일절 없는 회사를 운영할 정도로 키워왔고, 인조모피로서는 세계 1등 기업이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재정이 어려운 모교에 저의 기업 경영 경험을 접목하여 명문 학교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충남 공주입니다. 유구면 탑곡리라는 산골인데 전깃불도 없고 도로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어요.


초등학교가 있는 곳까지 나오려면 산길을 넘고 비포장도로를 걸어 하루에 총 12킬로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희 동네에서 20명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중에서 유일하게 제가 서울 중동중학교에 유학을 왔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하는데 시골에서 돈 나올 곳이 없는 겁니다. 사방이 산이고 밭인데 거기서 돈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육남매 장남인데 위로는 누님 한 분이 계시고 아래로는 동생만 넷입니다. 그래서 상고를 가서 졸업해 은행에 취직해서 돈을 벌자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은 야간대학을 가든지 나중에 목표를 세우기로 하고요. 그래서 보인고에 진학하게 된 겁니다.



Q. 보인고 학생회장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A. 저는 키가 작다 보니까 맨 앞줄에서 5~6번이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반에서 가장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애들한테만 반장을 시켜주는 겁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총 학생회장에 출마했죠. 당시 네 명이 후보가 나와서 경합을 했는데 굉장했습니다. 제가 기호 4번을 받았는데 ‘작은 거인 김석한’이라고 선거구호를 만들었어요. 학교 담벼락에다 선거포스터를 붙였는데 저는 미술부 친구들한테 가서 선거포스터를 그린 다음에 제대로 선거 운동을 했습니다.


상고에서는 가장 다크호스가 주산부 학생들이었는데 저는 보이스카우트을 했습니다. 원래 보이스카우트는 돈이 있는 집안 아이들이 하는 건데 지원하는 애들이 없다 보니까 각 반에서 할당을 해서 2명씩 뽑았어요. 거기에 제가 들어간 거죠. 저는 어디 한 곳에 소속이 되면 아주 집중하는 성격입니다. 보이스카우트 해봐야 전학년 다해서 20명 정도인데 그 20표로 주산부 부기부 200명의 표를 이겨서 총 학생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웅변을 했습니다. 지금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데 예전에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했어요. 전교생을 세워놓고 올라가서 연설을 하면 모두 제압됐죠. 그것으로 총 학생회장 선거에서 압승을 한 겁니다. 제가 학생회장을 하고 있을 때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최초로 보인고생 전교생을 이끌고 일본대사관으로 갔습니다. 광화문 네거리를 활보해서 동아일보 앞에서 성명발표를 했는데 저희 학교 전교생이 거기에 집결한 겁니다. 스크럼을 짜서 질서정연하게 갔는데 맨 앞에는 3학년 중에서도 몸집이 큰 학생들을 세우고 가운데는 1학년을 세우고 맨 뒤에는 2학년을 세웠어요.


당시 동아일보사 앞에서 성명 발표를 하려고 하는데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은 겁니다. 마침 세워둔 검은 승용차가 있기에 차 지붕에 올라가서 성명을 발표했죠. 그런 다음에 화신백화점 쪽으로 돌아서 소방서 있는 데까지 가서 집결했는데 경찰이 바리게이트를 쳐서 들어가진 못했죠. 거기서도 우체통 위에 올라가 성명발표를 했어요. 당시 동양방송이라고 TBC가 있었는데 저녁 뉴스에 제가 학생들을 이끌고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크게 나왔죠. 장학사들하고 학교 관련된 분들이 전부 따라다닐 정도로 굉장했어요. 그러나 아주 질서정연하게 성명을 발표한 후 교가를 부르면서 학교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Q. 보인상고에서 보인정보산업고로, 또 인문계고로 전환했고, 2011년에는 자율형 사립고로 바꿨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학교로 탈바꿈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경과와 성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A. 보인고 시절에는 공립을 제외한 사립학교들은 등록금을 받아서 학교운영을 하기 때문에 등록금을 많이 받아야 학교운영이 잘 됐습니다. 교실 수는 부족한데 학생을 많이 받다 보니까 야간에 공부하는 학교들이 많았어요. 저희학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러다 보니까 야간학생들이 있었던 학교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보인고가 광화문 부지를 팔고 송파로 이전을 했는데 장화를 안 신으면 못 다닐 자리였다고 해요. 송파로 이전한 후에는 정부정책에 따라 보인정보산업고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 겁니다.


어느 날 학교를 가보니까 제가 다닐 때 학교가 아니라 참 마음이 아팠죠. 때마침 축구부가 창단됐기에 이 아이들이 공부로는 한계가 있으니 축구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키워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약 16년 동안 축구후원 회장을 했습니다. 1년에 1억~1억5천만원을 지원해야 했는데 선수들이 먹고 자는 것에서부터 타고 다닐 버스를 구입하고, 축구선수로 커나갈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을 스카웃 해오는 등 지원을 해왔죠. 저는 기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축구에 관심이 많아 축구부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러다 기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 후원회장을 맡게 된 것이죠. 그때 기른 선수들이 지금은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선수가 구자철 선수이고, 서정진 선수와 프리킥 달인인 김형범 선수, 김영우, 서상민, 최철순 선수 등 이러한 선수들이 저희 학교출신입니다. 축구부에 지원을 아끼지 않다보니까 축구부는 날로 발전하는데 학교는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 가는 겁니다. 학교가 알려졌으면 덩달아 좋아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 것이죠.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까 학교재단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학교재단 이사장은 학교가 설립될 당시 가장 많은 돈을 내놓았던 창설자의 며느님이셨는데 어느 날 이사장께서 저를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해서는 돌아가신 시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모교에 대한 사랑도 그렇고 후배들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해서 학교이사장을 맡았는데 막상 맡아 놓고 보니 ‘정보고’라는 타이틀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청에 요청을 했어요.


그런데 학교를 전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당시 교육청에 가서 제가 그랬습니다. 기업인으로서 내 모교를 살리겠다는데, 그것도 기업에서 번 돈을 모교에 환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겠다는데 무슨 제약이 필요하냐고. 교육청 심사위원 앞에서 청문회도 했습니다. 학부모 대표들, 시민운동 단체까지 와서 반대를 했는데 제가 그들을 설득했어요. 인문고 전환 시기도 졸업 101회부터로 맞췄습니다. 상고생이 100회 졸업생으로 마무리를 지은 다음에 101회부터는 인문고생이 되도록 한 거죠.


당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0년은 상고로 이 나라에 기여를 했다면 새로운 100년은 인문고로 국가 인재를 길러내겠다. 인문고로 전환해서 첫 졸업생 4명을 서울대에 진학시켰는데 이거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2년 후에 다시 자율형사립고로 전환하게 된 겁니다. 자사고 인가를 받은 첫해에는 지원율이 77%였습니다. 당시 마이너스 23%는 추가 모집을 해서 채웠죠. 그 다음에는 1.01:1, 그 다음 해에는 1.45:1, 다음은 2.5:1, 그 다음은 2.53:1, 작년에는 서울에 있는 자사고 중에서 여자학교를 제외한 남고와 남녀공학 중에서 3.05:1로 경쟁률이 제일 높았습니다. 또 지난해 378명 졸업 인원 중에서 307명이 서울 안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올해는 390 여명이 넘습니다. 서울에 있는 주요 대학에 262명이 진학했지요.


Q. 졸업생들이 명문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명문대학에 간다고 반드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리란 보장은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을 못하고, 산업현장이 요구하는 인력을 대학이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따갑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인중·고등학교의 인재상과 육성책을 말씀해주세요.


A. 제게 교육관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겠지만 피교육자인 학생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성 교육이 가장 기본이 돼야 한다고 보는 거죠. 인성이 기본이 되면 공부하지 말라 해도 공부하게 됩니다. 저는 기업인입니다. 기업에서 제품을 잘 만들어서 고객이 많이 사줄 수 있어야 하듯 학교에서의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입니다. 그렇다면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의 고객인데, 그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학교경영이 뭐냐는 거죠.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대학보내기 위한 주입식 교육에만 몰두하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교라는 곳을 인정하지 않고 학원에 가서 사교육으로 대학을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학교는 사교육비를 없애는 방향으로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Q. 전환하는 과정도 어려웠겠지만 더 힘든 일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게 가장 힘들었습니까?


A. 학교를 맡고서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는데 인문계로 전환하고 나니까 상고에서 가르치던 교사 35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거기에 원래 6반이던 학급이 인문계로 전환하고 나니까 12개 학급으로 늘어난 겁니다. 새로운 교사 70명을 새로 채용해야 하고 기존 35명의 교사를 내보내야했어요. 그중에서 젊은 교사 5~6명은 부전공을 시켜서 중학교로 보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30여 명의 교사들이었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맨투맨 설득을 해서 명퇴시켰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70명의 교사들을 아홉 단계에 걸쳐서 채용했습니다.


당시 저는 교사채용에서 만큼은 어느 누가 부탁을 하더라도 절대로 수용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깔았습니다. 그렇게 ‘투명성’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70명의 교사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단 1원도 받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교사채용 시 뒷돈 관행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투명하고 떳떳하니까 교사를 채용할 때도 아홉 단계라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필기시험을 치르고 인성고사와 교양시험도 치렀습니다. 전공과목 시험도 보고요. 시험 문제도 외부에 있는 대학교수 및 실력 있는 전문가들에게 문제를 내도록 해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 다음에 면접을 볼 때는 3단계를 거치고요. 이렇게 아홉 단계를 거친 다음에는 복수로 뽑아 잘 맞는지도 검토했습니다. 그렇게 채용된 교사들이 현재 70여 명인데 서울대, 연대, 고대 출신이 전체의 75%이고 나머지 25%는 중앙대, 한양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외대 출신들입니다. 교사들의 평균 연령도 35세 정도입니다. 이 교사들을 진두지휘하는 교사 8명은 외고 및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대학진학 노하우를 갖춘 40대 초반의 교사들을 스카우트 해왔습니다. 감사한 것은 모든 선생님들이 너무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라는 겁니다.


Q. 보인고등학교만의 특별한 규율이 있는지요?


A. 저희 학교에서는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도록 합니다. 학생들의 저녁밥은 학교에서 먹입니다. 아침에는 한 시간 일찍 학교에 와서 명상도 해야 하고 체조도 시킵니다. 5교시가 끝나면 30분 동안 오수시간을 가지는데 이 시간에는 불을 끄고 교사와 학생이 30분 간 낮잠을 잡니다. 그러고 나면 머리가 아주 맑아집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30분 간 각자 1인 1기 체육을 하도록 합니다.


체육은 인증제를 만들어서 패스를 해야 졸업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녁 먹은 다음에는 학생들이 각자 농구, 축구, 태권도, 검도와 같은 운동을 합니다. 낮에 30분, 저녁에 30분씩 해서 하루 한 시간동안 각자가 자기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겁니다. 학생들이 저녁 먹은 후 운동하는 것에 대해 너무 좋아합니다. 저희 학교는 야간 자율학습실에 공부방이 400여 개 됩니다. 새로 건물을 지어서 만들어 줬는데 개인 사설 독서실이나 마찬가지죠. 밤이면 각 교실마다 불이 불야성 같이 켜져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밤 10시10분이면 학교 앞에 스쿨버스 22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형버스가 아닌 25인승 버스들입니다. 왜 대형버스를 안 쓰냐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아이들이 바로 집으로 가야지 빙글빙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합니다. 학교에서 잠실부근까지 15분이면 갑니다. 저희 학교가 학부모 만족도가 높은 것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추가로 공부하고 싶은 과목에 대해 금요일 오후부터 주말, 휴일까지 학교를 개방하여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학교는 24시간 문이 열려 있습니다. 기숙사도 60여 명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습니다. 집이 먼 학생들은 거기에 들어와서 생활하면 됩니다. 꼭 학원에 가고 싶은 학생은 갔다가 자기 공부방에 다시 와서 공부하면 됩니다. 저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개방성을 주고 자연스럽게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규칙 같은 걸 만들어 놓지 않아도 다 따라옵니다. 아마도 학교 이사장 중에서 제가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줄 겁니다.



Q. 보인고등학교는 자사고의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자사고의 운영 경험에 대해 다른 학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A. 학교이사장을 맡고 나서 학교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이전에 명예박사 학위는 받았었지만 교육학에 대해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고 생각해서 공주대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교육학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고 나니까 기업인의 경험과 더해져서 학교를 경영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앞서 언급했지만 직접 회사를 만들어서 키워가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들은 교육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저희 회사의 사훈은 ‘우신’입니다. 30년 전에 만든 사훈인데 또又자에 새로울 新자를 써서 매일 새롭게 하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영어로는 everyday new, 이것이 제 신념이고 지론입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새로워야 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새로워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것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가 늘 저에겐 고민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저는 학교도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학교이사장을 맡아 운영하면서 교육계 계시는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디어를 따라갈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경영자의 리더십입니다. 현재 교육현장에는 이런 리더십이 부재하다고 봅니다. 저는 선생님이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돈 벌라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옛날 생각해보세요. 은사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희생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생각합니다. 그럼 결과는 어떻게 되겠어요? 자연적으로 사교육이 급증하고 교권은 추락할 거 아닙니까.


저희 학교는 약 30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서 10년 동안 공사를 해왔습니다. 천지개벽을 한 거지요. 100년 역사를 빼고는 다 바꿨습니다. 제가 교육청에 찾아가서 특별요청을 했습니다. 그동안 상고라고 방치해 놓고 뭐 하나 지원한 거 없으니 투자해 달라. 이사장인 나도 투자하겠다. 할 말이 없잖아요. 저희학교 운동장에는 국제축구연맹에서 승인한 가장 비싼 인조잔디가 깔려 있습니다. 인체에 무해한 최고의 잔디로 깔아 놓았어요. 몇년 쓰고 또 바꿀 테니 전교생에 다 개방하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요. 점심시간이면 너도나도 학생들이 뛰어나와 건강하게 운동합니다. 학교정문에 딱 들어서는 순간 학교가 살아있구나 이런 걸 느낀다고 해요. 10년 만에 이렇게 모든 걸 바꿔놓으니까 결실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바꿔나갈 겁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이 가장 개선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능이 가로 막고 있다는 게 문제인데 우리 아이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많이 시키면 시킬수록 창의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인재는 창의력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 창의력을 길러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전문가들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학교를 경영하는 경영자는 기질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경영 전문가니까 기업에서 얻는 경영노하우를 학교에 접목시킬 수 있었습니다만, 많은 학교에서 경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경영을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같이 할 때만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지요.



Q. 보인고는 축구부 명문이지요. 구자철 선수가 보인고 출신이고, 이사장님도 중등축구연맹 회장을 지내셨고,대한축구협회장에 출마하기도 했는데요. 보인고 축구자랑과 이사장님의 축구 사랑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제가 학교 축구부 후원회장을 맡아서 16년 간 지원해왔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축구계에서 저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알려지게 된 겁니다. 어느 날 한 분이 찾아와서 서울시 축구협회 재정을 담당하는 부회장을 맡아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당시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간 겁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축구에 관련을 가지고 가서 보니까 우리아이들은 11명이 뛰는데 상대방은 항상 심판까지 14명이 뛰더라고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막기 위해서는 임원으로 들어가서 활동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서울시축구협회부회장을 10년이나 했습니다. 전국 중등축구연맹 회장을 8년이나 했고요. 현재는 4년 동안 명예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축구협회 회장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자리가 봉사하는 자리인데 후보자가 네 명이나 나왔다는 건 축구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거거든요. 그 봉사를 더 잘 할 분을 뽑았으니까 저는 옆에서 최대한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늘 그럽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가 다 돼 가는데 축구로서 희망이 안 보이는 학생은 빨리 방향을 바꿔주라고. 가령 축구행정을 공부한다든지 심판이나 의료 쪽으로 방향을 틀어 줘서 학생이 빨리 그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해줘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야 학생도 혼란도 없고 불필요한 시간을 소비하지 않을 테니까요.


Q. 이사장님은 인조모피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인성하이텍을 창업하고 지금도 경영일선에서 활발하게 뛰고 있습니다. 인성하이텍의 기업 이념과 미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저는 30년 전에 어떤 일을 해도 된다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세계 1위 자리에도 올라가 봤죠. 하지만 요즘은 시장자체가 많이 줄었습니다. 당시 제가 하는 품목의 주력 시장은 곰 인형과 같은 완구였습니다. 인형에 들어가는 인조털을 공급 했었죠. 당시 완구는 전세계가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전자기기나 스마트폰 가지고 놀잖아요. 완구가 필요 없어진 겁니다. 물론 그 시장이 모두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재 시장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죠. 완구업체도 50%가 줄었습니다.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고 중국에서 생산을 거점화해서 돌아갔는데 요즘은 시장자체가 줄어 고가시장으로 비즈니스를 하면서 매출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벌려 놨던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젠 나이도 있고 언젠가는 자식에게 기업을 넘겨서 경영하게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부담 없을 정도로 잔가지들을 정리해서 모양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기업이 계속해서 양적, 질적으로 성장을 하면 좋겠지만 질적 성장 없이 양적으로만 성장하게 되면 나중에 제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기업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리모델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창업해서 30년 동안 경험하면서 터득한 철학입니다. 저희 회사가 중국 청도에 진출한 것이 92년입니다. 한 중수교가 되기 1년 전이었죠. 제가 하는 사업은 장치사업이다 보니까 중국청도에 약 3만5천여 평 규모에 공장을 가동했습니다. 그곳에 기계들이 가득 차 있었죠. 그러다 해당 업종의 중국 업체들이 상해 쪽에 많이 있어서 거기로 가서 기술로 경쟁하자고 생각하고 6년 만인 1998년에 상해에다 5만여 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시장이 바뀌어서 청도에 있는 완구회사들이 잘 안되다 보니까 전부 떠났어요. 이런 상황이 되니까 우리도 청도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오히려 청도공장이 사업에 장해가 되니까요. 지난해 결국 중국업체에다 넘겼습니다. 제 가격을 받지 못하고 넘겼죠. 왜 그러냐면 중국은 외국인이 기업을 정리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정리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쉽지가 않아요. 한국인인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회사의 법정대표를 중국인으로 바꾸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죠.


물론 수출기업이기 때문에 중국정부에 세금도 냈고 문제될 일을 없지만 중국 세무국에서 외국기업인이 정리하려고 한다면 많은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그래도 중국 근로자를 비롯한 제반문제들을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국내에서 진출한 기업들 중에 정상적으로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정리수순을 밟은 기업은 우리가 1호일 겁니다. 이제 중국은 정부의 불합리한 규제부터 근로자들의 생산효율과 그에 따른 보상금까지 외국기업이 들어가서 사업하기에는 경쟁력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저 나름대로 원칙이 있습니다. 중국에 가서 20년 동안 사업을 잘 했고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현장에서 먼지 마셔가며 노동한 근로자들인데 설령 중국법이 과하다 하더라도 중국에서 기업을 한 기업인으로서 그 법을 지켜야죠. 수년 동안 현장에서 고생하면서 근무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기업인들이 뒷정리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근로자들의 경제보상금이나 퇴직금을 떼어 먹고 야반도주를 해선 안 되죠. 물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럴 때는 노동중재위원회 중재를 요청하고 변호사를 선임해서 타협을 이끌어 내야 됩니다. 그렇게 정리를 깔끔하게 하다 보니까 현재 중국청도에서 공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성하이텍’이라는 이미지가 아주 좋습니다. 현재 상해에 5만여 평이나 되는 공장을 잘 가동하고 있기에 항상 미래를 생각하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Q. 맨 처음 청도에 진출했을 때와 지금 한중FTA가 맺어진 현재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A. 만만치 않다고 봅니다. 제가 중국으로 진출한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다 좋았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한국 직원들 한 명 월급이면 중국인 노동자 20명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한국 직원들의 월급대비 1.5명 내지 2명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미 중국이라는 곳은 경쟁력을 잃었다는 얘기죠. 우리 국내기업들이 중국으로 가는 것은 거기서 생산해서 외국에다 수출하기 위해서거든요. 결국 인건비 때문에 중국으로 진출한다고 봐야죠.


우리 중소기업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계속해서 저개발국을 전전하면서 보따리 들고 다니면서 가족하고 떨어져 살며 혼자 일해야 해요. 그렇게 벌어서 수출하고 우리나라에다 세금을 내는 겁니다. 우리는 석유가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땅을 파야 나오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다행히 조물주가 유일하게 우리한테 준 게 두뇌니까 창의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야 해요. 사실 지금 국내 중소기업들이 살아 있는 곳이 얼마나 됩니까. 과거 제조업을 하던 공단이 절반 이상이 줄었습니다. 현재 중국에 나가 있는 국내기업들은 점차 축소될 거라고 봅니다.


중국 기업들이 이미 따라올 만큼 따라왔습니다. 모든 업종이 마찬가지죠. 우리 기업인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그들의 실정을 잘 알아야 합니다. 20년 전만 해도 워낙에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보니까 일할 공간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제가 중국에 나가 사업을 한지가 벌써 25년이 됐습니다.


당시 우리공장에 서 일하던 사람들이 50~60대가 됐다는 얘기죠. 그 사람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한 명 밖에 낳지 않았어요. 그 애들이 적어도 20대 중후반은 됐을 거 아닙니까. 이미 애들이 있었던 분들은 30살이 다됐을 거고요. 그 사람들이 자식 하나를 자신들처럼 공장에서 일하게 가만히 나뒀겠습니까. 자신들은 비록 공장에서 일했지만 자식들은 그렇게 안 길렀죠. 결국 중국에는 제조업에서 일할 인력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는 업종 뿐 아니라 어떤 업종도 중국에서 생산을 하는 공장은 끝났다고 봐요. 뒤늦게 진출한 국내기업들이 점점 내륙의 소도시인 절강성이라든가 이런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젠 어딜 가도 일할 인력이 없습니다. 현재 베트남과 같은 나라는 젊은 층이 가장 많은 나라로 꼽히는데요. 젊은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일할 수 있는 인력이 풍부하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기업인들이 베트남으로 가야 하냐면 꼭 그렇지 않아요. 베트남 사람들도 머리가 아주 좋고 손재주도 좋습니다. 미국하고 무역도 아주 많이 합니다. 한국 기업인이 거기에 진출해서 비집고 갈 곳이 별로 없어요. 물론 삼성전자라든가 LG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이 갈 공간은 있죠. 그나라 자체에서는 그러한 업종에 투자하기에는 너무 크거든요. 가령 삼성전자가 베트남에 진출한다고 합시다.


한 도시를 먹여 살리죠. 그래서 당분간은 이러한 시스템은 통할 수 있으나 우리와 같이 중소기업들이 들어가는 건 상당히 어려울 수 있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들도 폐수라든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3D업종은 투자자체를 받질 않아요. 그래서 그런 업종들이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 미얀마 같은 나라로 가잖아요. 미얀마는 그나마 인구가 있어서 통할 수 있죠. 섬유업종에서 임금인상이 크지 않은 곳은 인도네시아라고 봅니다. 중국은 노조가 아주 강합니다.


노조원들이 외국기업에 더 강하게 결성되어 있죠. 앞서 경제 보상금 제도도 말씀드렸지만 외국기업에다는 더 내라고 떼를 써요. 자기네 자국기업에는 그렇게 할 수 없거든요. 그들의 무서운 점은 꽌시에요. 중국에서 흔히 하는 말로 꽌시가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풀릴 수 있고 역으로 하찮은 일이라도 이 꽌시가 없으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거든요. 이러한 민족성은 개혁·개방으로 많이 희석되고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중국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볼 수 있죠.


중국인들이 한국 화장품을 많이 사가잖아요. 제가 보기엔 조만간에 중국의 화장품 회사들이 한국 화장품을 사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화장품을 만들어 낼 거라고 봅니다. 북한에 개성공단 보셨잖아요. 하루아침에 다 놓고 나왔잖아요. 물론 중국은 그렇게까지는 안 되겠지만 사회주의로 출발한 나라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런 문화가 남아 있는 건 사실입니다. 중국정부가 우리 국내기업과 중국 기업 간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편을 들어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MeCONOMY Magazine March 2016
다음은 김석한 이사장이 올해 3월2일 보인고 입학식에서 행한 축사를 싣는다.



신입생 여러분!
치열한 경쟁을 뚫고 보인고등학교의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등학교 3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스스로 느끼고,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쉽지 않은 길의 동반자로 보인고등학교를 선택해 준 것에 대해 고맙고, 여러분의 선택이 훌륭한 선택임을 학교가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학교는 해마다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보인은 명실상부 송파를 넘어 서울을 대표하는 자율형사립고로 그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작년 입시에서도 서울대와 의대 22명과 연고대 48명을 포함하여 서울 주요대학에 260여 명이 합격하는 성적과 수도권 대학까지 재학생의 86%가 합격하는 실적을 거두었습니다. 밤 10시까지 불 꺼지는 교실이 단 하나도 없는 환경에서, 사교육비 없이 최선을 다한 학생들의 노력과 선생님들의 열정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앞으로도 보인의 전통이 될 것입니다.


신입생 여러분!
우리 학교의 교훈은 ‘날로 새롭게, 바르게 살자, 베풀며 살자’입니다.
‘날로 새롭게’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발전된 내일을 이뤄간다는 뜻으로 우리 보인학교가 강조하는가장 큰 가치임을 꼭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부모 여러분!
인생 설계에 더없이 중요한 3년을 앞두고 학교 선택에 많은 고심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재단 이사장으로, 지난 10년간 보인고등학교가 이룬 비약적 발전의 토대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그고심에 대한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교육계의 금언이 있습니다.
본교는 엄정하고 공정한 평가를 통해 인성과 실력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학교 혁신의 모범이 될 교사들을 선발했습니다. 변치 않는 열정에 경험까지 더한 교사들이, 학생들과 매 순간을 함께 할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도 변치 않을 보인의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둘째, 보인은 ‘최고의 지성은 바른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교육목표를 실천합니다.
모든 교육활동에는 바른 인성 함양을 위한 세심한 고민들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날로 새롭게, 바르게 살자!’ 베풀며 살자!‘ 인 본교의 교훈은 끊임없이 자기변화를 실천하면서도 이웃과 사회의 아픈 곳까지 배려하는 그러한 지성인 육성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본교의 인성을 중시한 학칙과 규율은 모든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엄격히 적용될 것입니다.
셋째, 보인은 공교육이 실천해야 할 교육활동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교사모임에서 우리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활동이 무엇일까를 협의하고 이를 학교 교육에 반영합니다. 이는 교과 및 비교과 영역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학교 안에서 모든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라!’는 것이 학교에 대한 이사장의 일관된 주문입니다.
밤 10시까지 불 꺼지는 교실이 없다는 것이, 보인의 교육활동에 대한 많은 부분을 학부모님들께 전해 드리리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보인은 인재 육성을 위한 재단과 지원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300억원이 넘는 투자로 교육환경을 개선했습니다.
꿈을 키우는데 경제적 유불리가 작용하지 않도록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지원에 아낌이 없습니다. 이미 충분한 장학금을 마련했으며, 올해도 각계각층에서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이 추가로 접수되고 있습니다.


저는 ‘기업을 통해 얻은 이익을 교육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모교인 보인고등학교를 인수했습니다. 앞으로도 후배들의 교육을 위한 지원과 투자에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학부모 여러분!
저의 학교 경영 원칙은 투명 경영입니다. 학교 운영 또한 저의 이런 경영원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에 모든학사 운영이 투명합니다.
보인고등학교가 교육계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무서운 성장과 함께 학부모님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과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의 경영원리를 학교경영에 접목시킴으로써 학교의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님들이 만족할 수 있는 고객만족경영을 착실히 실천해 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안으로는 학교가 먼저, 날로 새롭게 발전하는 ‘우신’의 가치를 실천했고 교사들은 생활하는 모습 자체가 인성 교육의 교과서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교육정책의 변화가 초래할 경과를 빠르게 예측하고 대응함으로서 자녀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교육여건을 조성했습니다.


또한, 2016년이 2015년과는 또 다른 한해가 되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항상 새롭다는 것이 보인의 힘이고, 보임을 신뢰하는 많은 후원의 원천입니다.
신입생 여러분은 푸른 교정에서 여러분의 꿈을 마음껏 펼치세요.
학부모님들께서는 우리 아들들이 보인의 전통 속에서 소중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시고, 학교에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저를 포함한 모든 보인 가족들이 보인이 모교로 인연이 된 것을 진심을 축하하고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3월 2일
대주학원 이사장
김 석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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